고영훈 교수의 ‘자바 우체부길’

<신간도서>

인도네시아 눈물과 상처 배인 동서 1천㎞ 도로
네덜란드 식민통치 시절 1만2천명 희생으로 만들어져
문화유산 소개에 그치지 않고 ‘학자적 느낌·내공’ 담아

<저자 고영훈 교수의 한 마디>

만약 인도네시아 어느 한적한 시골의 도로표지판에 수라바야까지 100킬로미터 남았다는 표지가 있다면 수라바야의 어느 지점까지의 거리를 말하는 것일까? 수라바야 시청? 아니면 수라바야 기차역까지일까? 아니다. 수라바야 우체국까지의 남은 거리를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인도네시아에서 그만큼 우체국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뜻한다. 적어도 200년 전에는…… 그렇다면 우체부도 중요하고 우체부길도 중요했을 것이다.

일전에 친구와 저녁을 먹다가 자바 우체부길 이야기가 나왔고 ‘우체부’라는 용어를 그대로 쓸 것인지에 대한 의견 교환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같은 의미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말이 ‘집배원’, ‘우편배달부’, ‘포스트맨’ 등 여럿 있다. ‘편지 나르는 사람’에 대한 정부의 공식 명칭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지금까지 쓰이는 ‘집배원’이다. 1884년 우정총국 창설 직후엔 체전부(遞傳夫), 체부, 분전원(分傳員), 우체군(郵遞軍)이란 말이 쓰였다고 한다.

실제로 이인직의 ‘혈의 누’, 이상의 수필 ‘산촌여정’에 ‘체전부’라는 말이 등장하고, 김유정의 ‘동백꽃’에는 ‘체부’라는 말이 나온다. 문제는 ‘길’이 뒤에 붙는 점이다. 공식명칭이 집배원이라고 해서 ‘집배원길’으로 불러보니 어색하다. 다른 용어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체부길’을 사용하기로 했다.

도대체 ‘자바 우체부길’이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하자면 자바 우체부길은 자바의 서쪽 끝 아냐르(Anyar)에서 동쪽 끝 빠나루깐(Panarukan)까지 1,000킬로미터에 달하는 도로를 말한다.

이 도로는 1808년 당시 인도네시아를 통치하던 네덜란드 식민통치 정부 다엔델스(Herman Willem Daendels) 총독의 주도로 건설되었다. 새로 건설한 구간도 있지만 대부분의 구간은 폭이 좁은 기존의 도로를 너비 7.5미터의 왕복 2차선 도로로 보수한 것이다.

그런데 왜 우체부길인가? 다엔델스 총독은 이 도로를 건설하면 서 매 4.5 킬로미터마다 초소를 만들고 이 초소가 정류장 혹은 우편물 수발업무의 기능을 갖도록 하였다. 말하자면 이 초소는 조선시대의 우역(郵驛)과 같은 기능을 하는 곳이었다.

자바 우체부 길은 인도네시아인을 위하여 건설된 것이 아니었다. 자바에서의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원활하게 하려는 의도로 건설되었다.

영국의 공격으로부터 자바를 지켜내기 위하여 다엔델스에게는 강한 해군력이 필요하였다. 그는 자바의 젊은이들을 해군으로 징용하였고 바타비아(지금의 자카르타)에 군사훈련 시설을 세웠으며 스마랑 지역에서는 무기를 제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도로의 건설은 필수적이었으며 이것이 다엔델스로 하여금 무리하게 우체부길을 건설하게 만든 배경이다.

이 도로를 건설하면서 다엔델스 총독은 인도네시아인 12,000명을 죽게 만들었다. 실로 적지 않은 숫자의 인도네시아인이 희생되었다. 다엔델스는 단 시간 내에 공사를 끝내기 위하여 지역별로 작업을 할당하고 기한 내 작업량을 완수하지 못하는 구역의 책임자를 작업 구역의 나뭇가지에 매달아 죽였다.

해당 작업 구역의 책임자는 자신이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휘하의 근로자들을 혹독하게 다그칠 수밖에 없었고 열대우림 지역에서의 무리한 부역은 많은 현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야말로 인도네시아 역사상 유래 없는 학살인 셈이다. 인도네시아인들이 결코 쉽게 잊을 수 없는 죽임이었다. 식민통치국의 이익을 위하여 피 식민통치국의 선량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한 것이다.

길이 주는 의미는 다양하다. 길은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소중한 장치이며 결국은 소통의 중요한 수단이다. 길은 근대화, 현대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우리가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나 철길이 없는 근대화나 현대화를 생각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오래전부터 이 우체부길에 관심이 있었다.

내가 전공한 작가 쁘라무디아(Pramoedya Ananta Toer) 선생이 이 우체부길에 관한 책을 쓴적이 있어 이 길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도네시아를 전공하는 학자로서 이 우체부길이 주는 의미를 반추해보고 싶기도 했다. 나는 그 길을 따라가 보기로 하였다.

나는 자바 우체부길을 달리면서 이 길이 지나가는 지역과 연관된 스토리를 떠올렸다. 그것은 흡사 하나의 변주곡과 같아서 그들의 식민통치 세력에 대한 저항의 이야기, 패배에 대한 회한의 절망감, 그리고 그들의 선조들이 이룩한 찬란한 문화유산에 관한 독백이었다. 내가 이러한 유의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지금은 워싱턴 특파원으로 가 있는 세계일보 박종현 기자의 제언 때문이다.

나의 제자이기도 한 박 기자는 어느 날 나와 함께 ‘대중과 소통하는 학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20년 차 인도네시아학자로서의 나의 연구 족적을 뒤돌아보았다. 인도네시아 문학을 연구하고 관련 논문 및 서적을 국내외에서 출간하긴 했는데, 과연 나는 얼마나 많은 대중과 소통했는가? 쉽게 말해 나의 연구물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읽었겠는가? 나는 쉽게 긍정적인 답을 하지 못했다.

양적인 측면에 초점을 둔 대학의 연구평가 시스템에 매달린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까짓 논문 좀 덜 쓰면 어떤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인도네시아를 대중들에게 쉽게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문화를 소개하는 책을 시리즈로 쓰기로 했고 이 『자바 우체부길』이 첫 번째 결실이다.

나는 이 책을 준비하면서 자동차로 우체부길을 답사했다. 1,000킬로미터의 우체부길을 왕복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힘든 여정을 함께 해 준 안디까(Andhika)와 운전기사 마르띤(Martin)의 수고가 없었다면 여행이 어려웠을 것이다.

이 시리즈를 구상하면서 우리 학교 지식출판원의 신선호 팀장이 많은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마지막 원고 정리 단계에 3개월 간 머물렀던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의 자료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대학 동남아과 안트 그라프 교수(Prof. Dr. Arndt Graf)가 중요한 자료를 열람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 분들을 비롯하여 마음으로 후원해준 여러 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나는 이 책을 딱딱하게 쓰지 않기로 했다. 가급적 학문적 긴장감을 배제하고 최소한의 정보 전달에다가 내가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로 엮어갈 예정이다. 이제 현장을 중계하듯 써내려가 보려 한다. 자바 우체부길에 대한 조그만 인상이라도 독자들에게 남겼다면 무거운 사진기를 들고 뙤약볕을 뛰어다니던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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